SUNG ROK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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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믹 패러독스

황정인

시원하게 펼쳐진 광활한 풍경. 잠시 후 풍경에 몰입해있던 눈은 화면의 정 중앙에서 곤충같이 꼬물거리는 작은 점을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실제 풍경을 담은 고화질 영상에서부터 디지털 페인팅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이 수평,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제 3의 시선은 얼핏 모든 것을 관조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에 공평한 시선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최성록은 다양한 디지털 매체를 통해 이미지를 경험하는 오늘날의 시각문화에 관심을 갖고, 그것이 작동하는 원리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식의 문제를 개인의 미시사와 동시대의 사회, 문화, 역사와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미미한, 그러나 거대한
화면의 중앙 혹은 주변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작은 존재들,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 이것을 조망할 수 있도록 돕는 일정한 거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 유쾌한 듯 보이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잔혹 동화처럼 세계의 이면을 낱낱이 전하는 영상과 사운드. 최성록의 영상 작업에서 이제는 하나의 선명한 조형언어로 자리 잡은 이러한 특징들은 2000년대 초부터 조각, 회화, 영상을 통해 발표해 온 작업들을 통해 가능했다.
플라스틱 모델(plastic model)의 조립설명서와 부품들의 쓰임새를 완전히 전복시킨 채 상상 속의 형상들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공중에 띄운 조각들(2003-2004), 일상 속에서 너무 미미하여 관심 밖이었던 사물의 생김새를 캠스코프(Camscope)로 확대 촬영하여 낯선 풍경으로 전환하고, 인물을 그 안에 움직이는 작은 생물처럼 축소하여 배치한 싱글채널 영상작업 연작(2005)은 기본적으로 그의 작업에서 대상에 대한 가치와 인식의 문제를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인간이 만든 법칙이나 관습적인 사고가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동될 수 없다는 점, 인간 중심적 사고가 지닌 한계와 대자연에 대비되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특유의 상상력과 디지털 영상기술을 이용한 조형감각으로 가시화한다. 이것은 2015년 개인전 ‘유령의 높이’에서 소개한 (2015)와 연작(2015), 2016년 개인전 ‘구원자의 길(Savior's Road)’에서 선보인 (2016)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대상에 대한 이러한 세계관은 그가 작품에 사용하는 매체와 그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물리적, 광학적 거리감을 통해 구체화되는데, 최근에 작가가 작업의 주 매체이자 소재로 활용하고 있는 드론은 그 관점을 더욱 정교하게 드러내는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작업에 또 다른 내러티브와 해석적 관점을 덧대고 있다.

구체적인, 그러나 보편적인
뉴미디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포용하는 태도,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해온 시간은 최성록의 작업에서 내러티브를 발전시키고 인식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2006년에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화성탐사로봇을 소재로 믿음직한 정보를 생산, 재구성, 가시화하여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 공상과학 프로젝트 ‘The Rocver Project’를 소개했다. 이후 작가는 2010년까지 5년간 동명의 프로젝트를 지속해나간다. 이것은 2000년대 초부터 진행한 회화, 조각, 영상의 형식적 실험, 과학기술에 대한 개인의 관심사를 종합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그의 작업에서 하나의 명확한 내러티브의 구조를 갖추기 시작한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이후 작가는 미국 유학을 통해 이러한 작가적 관심사의 근원을 탐구하고 보다 적극적인 형식 실험을 시도하는데, 대학원 재학시절 발표한 ‘Landscape of Chois’(2010)는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개인사가 어떻게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면서 세대 간의 분절된 기억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내는지 보여준 프로젝트다. 여기서 작가는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까지 약 100년간 삼대에 걸친 세대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전쟁의 기억과 이미지를 애니메이션에 풍경화, 초상사진, 인포그래픽을 각각 결합한 영상 설치작업(, , , 2010)으로 보여준다. 즉, 개인의 관심사를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은 작가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그 안에서 개인과 가족이 경험한 미시사는 세대가 경험한 근현대의 거시사와 자연스럽게 만나면서 작품 속의 이야기 구조를 더욱 단단하게 형성해나간다. 또한 이것은 역사와 사회, 문화에 대한 동시대적 인식과 미디어를 통해 야기되는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 확장되어, 이후 (2010)에서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으로, (2011)에서 미디어로 각색된 군사문화에 대한 풍자로, (2015)에서 가상적 공간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들의 모호한 주체성에 대한 고백으로,
연작에서 가상과 실재 공간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맴도는 현대인의 초상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확장을 통해 다양해진 주제의식은 작가의 작품에서 중요한 형식적 특징으로 자리한 회화적 애니메이션과 영상작업, 디지털 매체와 영상기술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다.

회화적인, 그러나 움직이는
최성록은 본래 회화를 전공했다. 앞서 소개한 대부분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볼 때 영상작업의 형식을 취하지만, 기본적으로 디지털 페인팅 방식으로 제작되거나 회화적 전통에서 이야기되는 실재와 환영의 문제, 원근과 착시의 원리, 그리고 평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대상에 대한 완벽한 사실적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이미지의 형상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디지털 환경 속에 벌어지는 이미지 인식의 문제, 그로 인해 대상이 시각화 되는 방식을 애니메이션 효과를 통해 다양하게 실험한다. 대표적으로 는 내비게이션 혹은 디지털 게임이 생산한 디지털 이미지에 익숙한 세대가 가상과 실재 공간에서 이미지와 움직임을 인지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의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이를 위해 위성사진과 드론촬영으로 수집한 공간이미지를 디지털 페인팅기법으로 재가공하여 이차원의 가상의 지도를 만들고, 그것에 움직임 효과를 주어, 화면 속에 고정된 위치에 그려진 자동차가 지도 속 공간을 마치 탐험하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다양한 감각적 자극이 존재하는 현실공간을 이차원의 평면세계처럼 인식하면서 발생하는 기억과 인식체계의 변화, 그리고 직접적인 경험과 기억의 부재로 야기되는 감각의 퇴화, 상실의 문제를 조심스럽게 건드린다.

수직, 수평으로 넓고 높은, 그러나 모호한
최성록의 영상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다채널 영상투사를 이용해 수평으로 넓은 파노라마뷰 영상이나, 드론 촬영기법을 이용한 수직시점의 고화질 영상을 제시하여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제안한다는 점이다. (2012)과 은 게임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파노라믹뷰에 기초하되,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화면 곳곳에 배치하고 이것이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되다가 일정한 시점에서 전체 영상의 기승전결의 구조 안에 다시 맞물리면서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작동하는 방식을 취한다. 가로로 넓게 펼쳐진 파노라믹뷰는 외관상 부분과 전체의 긴밀한 관계를 한 번에 조망이 가능한 상황을 연출하지만, 실제로 그 폭은 인간의 육안으로 한 번에 자세하게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한다. 각각의 장면은 단편적인 이야기 구조를 유지하면서 비선형적 전개방식으로 화면 곳곳에 파편처럼 흩어져있으며, 그 자체로 상징적이고 독립적인 의미를 지닌 채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의 오른쪽 코너에서 전광판처럼 영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실시간 중계하는 화면은 전체와 부분의 이러한 희미한 연결성을 부각시킨다. 즉, 고해상도로 구현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파노라마뷰에 의해 생성되는 일정한 거리는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결국 전체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이것은 사회 시스템과 기계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류는 구원받지 못한 채 파괴된 자연과 인간성 상실로 파국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은유적으로 이야기하는 작품의 의도와 그 맥을 같이한다.
한편
연작은 드론을 이용해 일정한 높이의 시선을 유지하며 작가 자신의 모습을 부감 촬영한 것이다. 영상 속 배경과 인물은 컴퓨터 게임 속 디지털 시뮬레이션 공간과 가상의 캐릭터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실재하는 현실공간이며, 살아 숨 쉬는 인간인 작가 본인이다. 화면 안에서 드론의 모습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일정한 위치에서 감시하는 시점을 통해 마치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을 상정할 뿐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가상과 실재 공간의 모호한 경계선에서 주체의 위치와 그 의미를 반복적으로 치환해가며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담았다. ‘인류의 역사를 둘러싼 관조적 기억, 사실의 기록과 함께 환상을 구조화하고, 새로운 역사적, 문화적, 이념적 풍경을 만들기 위해 양극화된 양식과 상태를 흐린 상태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작가의 말처럼, 선명한 영상 안에서 초점을 잃은 시점, 주체와 객체의 파악이 모호해진 익명의 상황은 이미지의 표면 위로 관객의 시선이 끊임없이 맴돌도록 유도한다.

안타까운, 그러나 숭고한
‘모두가 보인다(panhoran)’는 뜻의 파노라마의 어원적 의미를 역설하듯 최성록은 현실에 가까운, 더 나아가 현실 그 자체를 그대로 담은 영상과 매체를 적극 이용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경험과 인식의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건넨다. 고도의 디지털 영상기술이 생산하는 정보가 과잉으로 치닫는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얻고, 잃으며, 또 기뻐하며 두려워하는가. 흥미롭게도 작가는 오늘날의 디지털 이미지 문화 안에서 실재 세계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주체의 상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을 향해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 기술문명에 대한 유희적 태도와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디지털 이미지 세계의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 그러한 세계가 안겨줄 감각적 희열을 만끽하되, 그 안에서 유실되거나 퇴화되는 감각들, 빠르게 변화하는 인식의 체계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그의 작업에서 기술이 안겨준 유희와 이미지의 숭고하고 황홀한 경험, 판단력이 상실되어가는 상황에 대한 고찰이 공존하는 방법이 아닐까.

글: 황정인
2017년 토탈미술관 비디오 포트레이트 전시 작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