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G ROK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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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믹 패러독스
황정인
시원하게 펼쳐진 광활한 풍경. 잠시 후 풍경에 몰입해있던 눈은 화면의 정 중앙에서 곤충같이 꼬물거리는 작은 점을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실제 풍경을 담은 고화질 영상에서부터 디지털 페인팅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이 수평,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제 3의 시선은 얼핏 모든 것을 관조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에 공평한 시선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최성록은 다양한 디지털 매체를 통해 이미지를 경험하는 오늘날의 시각문화에 관심을 갖고, 그것이 작동하는 원리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식의 문제를 개인의 미시사와 동시대의 사회, 문화, 역사와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미미한, 그러나 거대한
화면의 중앙 혹은 주변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작은 존재들,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 이것을 조망할 수 있도록 돕는 일정한 거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 유쾌한 듯 보이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잔혹 동화처럼 세계의 이면을 낱낱이 전하는 영상과 사운드. 최성록의 영상 작업에서 이제는 하나의 선명한 조형언어로 자리 잡은 이러한 특징들은 2000년대 초부터 조각, 회화, 영상을 통해 발표해 온 작업들을 통해 가능했다.
플라스틱 모델(plastic model)의 조립설명서와 부품들의 쓰임새를 완전히 전복시킨 채 상상 속의 형상들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공중에 띄운 조각들(2003-2004), 일상 속에서 너무 미미하여 관심 밖이었던 사물의 생김새를 캠스코프(Camscope)로 확대 촬영하여 낯선 풍경으로 전환하고, 인물을 그 안에 움직이는 작은 생물처럼 축소하여 배치한 싱글채널 영상작업
구체적인, 그러나 보편적인
뉴미디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포용하는 태도,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해온 시간은 최성록의 작업에서 내러티브를 발전시키고 인식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2006년에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화성탐사로봇을 소재로 믿음직한 정보를 생산, 재구성, 가시화하여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 공상과학 프로젝트 ‘The Rocver Project’를 소개했다. 이후 작가는 2010년까지 5년간 동명의 프로젝트를 지속해나간다. 이것은 2000년대 초부터 진행한 회화, 조각, 영상의 형식적 실험, 과학기술에 대한 개인의 관심사를 종합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그의 작업에서 하나의 명확한 내러티브의 구조를 갖추기 시작한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이후 작가는 미국 유학을 통해 이러한 작가적 관심사의 근원을 탐구하고 보다 적극적인 형식 실험을 시도하는데, 대학원 재학시절 발표한 ‘Landscape of Chois’(2010)는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개인사가 어떻게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면서 세대 간의 분절된 기억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내는지 보여준 프로젝트다. 여기서 작가는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까지 약 100년간 삼대에 걸친 세대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전쟁의 기억과 이미지를 애니메이션에 풍경화, 초상사진, 인포그래픽을 각각 결합한 영상 설치작업(
회화적인, 그러나 움직이는
최성록은 본래 회화를 전공했다. 앞서 소개한 대부분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볼 때 영상작업의 형식을 취하지만, 기본적으로 디지털 페인팅 방식으로 제작되거나 회화적 전통에서 이야기되는 실재와 환영의 문제, 원근과 착시의 원리, 그리고 평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대상에 대한 완벽한 사실적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이미지의 형상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디지털 환경 속에 벌어지는 이미지 인식의 문제, 그로 인해 대상이 시각화 되는 방식을 애니메이션 효과를 통해 다양하게 실험한다. 대표적으로
수직, 수평으로 넓고 높은, 그러나 모호한
최성록의 영상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다채널 영상투사를 이용해 수평으로 넓은 파노라마뷰 영상이나, 드론 촬영기법을 이용한 수직시점의 고화질 영상을 제시하여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제안한다는 점이다.
한편 와 연작은 드론을 이용해 일정한 높이의 시선을 유지하며 작가 자신의 모습을 부감 촬영한 것이다. 영상 속 배경과 인물은 컴퓨터 게임 속 디지털 시뮬레이션 공간과 가상의 캐릭터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실재하는 현실공간이며, 살아 숨 쉬는 인간인 작가 본인이다. 화면 안에서 드론의 모습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일정한 위치에서 감시하는 시점을 통해 마치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을 상정할 뿐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가상과 실재 공간의 모호한 경계선에서 주체의 위치와 그 의미를 반복적으로 치환해가며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담았다. ‘인류의 역사를 둘러싼 관조적 기억, 사실의 기록과 함께 환상을 구조화하고, 새로운 역사적, 문화적, 이념적 풍경을 만들기 위해 양극화된 양식과 상태를 흐린 상태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작가의 말처럼, 선명한 영상 안에서 초점을 잃은 시점, 주체와 객체의 파악이 모호해진 익명의 상황은 이미지의 표면 위로 관객의 시선이 끊임없이 맴돌도록 유도한다.
안타까운, 그러나 숭고한
‘모두가 보인다(panhoran)’는 뜻의 파노라마의 어원적 의미를 역설하듯 최성록은 현실에 가까운, 더 나아가 현실 그 자체를 그대로 담은 영상과 매체를 적극 이용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경험과 인식의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건넨다. 고도의 디지털 영상기술이 생산하는 정보가 과잉으로 치닫는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얻고, 잃으며, 또 기뻐하며 두려워하는가. 흥미롭게도 작가는 오늘날의 디지털 이미지 문화 안에서 실재 세계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주체의 상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을 향해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 기술문명에 대한 유희적 태도와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디지털 이미지 세계의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 그러한 세계가 안겨줄 감각적 희열을 만끽하되, 그 안에서 유실되거나 퇴화되는 감각들, 빠르게 변화하는 인식의 체계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그의 작업에서 기술이 안겨준 유희와 이미지의 숭고하고 황홀한 경험, 판단력이 상실되어가는 상황에 대한 고찰이 공존하는 방법이 아닐까.
글: 황정인
2017년 토탈미술관 비디오 포트레이트 전시 작가론